한국 야구장이 더운 이유 '관중석 그늘이 없음'
여름 낮경기를 다녀보면 이상한 점이 하나 있다. 같은 시간대 경기인데 어떤 구장은 오후가 되면 내야석에 그늘이 스르륵 내려앉고, 어떤 구장은 경기 내내 해를 정면으로 받으며 익어간다. 이건 우연도, 날씨 차이도 아니다. 구장이 어느 방향을 보고 지어졌는가의 문제다. 야구 규칙에는 '구장의 방향'이 적혀 있다공인야구규칙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본루에서 투수판을 거쳐 2루로 향하는 선, 즉 홈에서 센터를 바라보는 방향은 동북동(ENE)이 이상적이라는 권고다.이유는 간단하다. 조명탑이 없던 시절 야구는 오후에 열렸고, 해는 남쪽에서 서쪽으로 넘어간다. 외야가 동북동을 보게 지으면 타자·포수·주심은 해를 등지게 되고, 홈플레이트 뒤의 본부석(메인 스탠드)이 서쪽 해를 막아 그라운드와 관중석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대신 그 부담은 야수들이 진다. 해를 마주 보고 뜬공을 쫓아야 하니까. 메이저리그 낮경기에서 야수들이 선글라스를 끼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다. 동북동 구장은 '그늘을 관중과 타자에게, 태양을 야수에게' 주는 설계다.그런데 이 규칙, 원래는 '남향'이었다재미있는 건 이 규칙이 처음부터 동북동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NPB 공식 기록원 컬럼에 따르면 방위 권고는 여러 번 바뀌었다.1920~1930년: 남(南)1936~1949년: 남(南)1950~1955년: 서남서1956년~현재: 동북동고시엔(1924년 개장)과 라쿠텐 미야기(1950년)가 남향인 것은 규칙을 어긴 게 아니라 당대 규칙을 충실히 따른 결과다. 남향에도 나름의 논리가 있다. 테니스·축구 등 실외 종목의 정석인 '장축 남북' 배치라, 야수들은 북쪽을 바라보므로 해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실제로 NPB 기록원은 남향인 고시엔·미야기에서 맑은 낮경기에도 야수가 태양 때문에 타구를 놓친 기억이 없다고 증언한다.문제는 관중이다. 남향 구장의 본부석은 북쪽에 있고, 관중은 남쪽을 바라본다. 오후 내내 해가 관중의 정면에서 얼굴로 쏟아진다는 뜻이다. 남향 구장은 '그늘을 선수에게, 태양을 관중에게' 주는 설계인 셈이다.한국 구장은 어디를 보고 있나이번에 국내 구장들의 방위를 하나씩 확인해 봤다. 결과는 이렇다.사직: 남향. 2022년 개보수 때 "홈플레이트를 북쪽으로 당겼다"는 기록이 방향을 말해준다.수원 위즈파크: 남향. 외야가 체육시설이 모인 남쪽으로 뚫려 있다.문학 랜더스필드 / 창원 NC파크 / 대전 한화생명볼파크 / 울산 문수 / 포항: 남동향.구 무등구장 / 구 한화생명 이글스파크: 정남향. 이글스파크는 외야 너머로 보문산이 보이는 배치였고, 새 볼파크는 남동으로 틀어 식장산을 바라본다.잠실: 유일하게 북서 계열로 추정된다(지도 좌표 기반 추정치이며, 아래 '데이터에 대하여' 참고).즉 한국 구장 대부분은 규칙이 권장하는 동북동이 아니라 관중이 오후 해를 마주 보는 남향 계열로 지어져 왔다. 여름 낮경기 관중석이 유독 뜨거운 구조적 이유다. 왜 이렇게 지었는지에 대한 확실한 기록은 없다. 주택을 남향으로 짓는 문화의 영향이라는 설, 옛 일본식 구장 설계(=구 규칙의 남향)의 영향이라는 설, 심지어 패배(敗北)의 北 자를 꺼렸다는 속설까지 있지만 어느 것도 입증된 바는 없다.반전은 신축 구장에서 시작됐다2014년 광주-기아 챔피언스필드와 2016년 대구 삼성 라이온즈파크는 이 흐름을 뒤집었다.라이온즈파크는 포수가 바라보는 방향을 북동쪽에 두는 동북동 계열 배치로 지어졌다. 개장 당시 보도에 따르면 하지 기준 오후 6시에 관람석의 83%에 그늘이 지도록 설계됐다. 말 그대로 '선수가 아닌 관중을 위한' 선택이다. 대신 그라운드의 선수들은 낮경기 때 해를 바라봐야 한다.챔피언스필드도 외야가 정남향이던 구 무등구장과 반대로 동북동으로 지어졌고, 햇빛을 덜 받는 3루 쪽이 KIA의 홈 더그아웃이 됐다. 낮경기 수비 때 선글라스가 필수품이 됐다는 선수들의 증언도 있다. 관중에게 불편을 감수시키기보다 프로 선수가 적응하는 쪽을 택한 철학이다.이웃 나라들은?일본은 남향 전통이 지금도 살아 있는 나라다. 실외 6개 구장의 방위는 고시엔 남, 라쿠텐 미야기 남, 메이지진구 북북동, 요코하마 북북서, ZOZO마린 남서, 마쓰다 동북동 — 규칙대로 지은 곳은 2009년 개장한 마쓰다스타디움 하나뿐이다. 심지어 2017년 완공된 야마가타의 신축 구장도, 구라시키·마쓰야마 같은 지방 구장도 여전히 남향으로 짓는다.대만은 정반대다. 위성사진으로 전 구장을 실측한 자료를 보면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구장(구 타이중·자이시·타이난·가오슝)은 남향 계열이지만, 1990년대 후반 이후 신축된 톈무·신좡·타이중 저우지·청칭후·자이현·더우류·타이둥은 거의 전부 북동~동북동이다. 세 나라 중 규칙 준수율이 가장 높다.그리고 예외 중의 예외, 타오위안이 있다. 원래 설계는 정석대로 동북동이었는데 당시 지자체장이 정문을 큰길 쪽으로 내달라고 요구하면서 방위가 북북서로 틀어졌다. 그 결과 오후~일몰 경기에서 타자와 주심이 석양을 정면으로 봐야 하는, 사실상 야간경기 전용 구장이 됐고, 1루석이 오후 내내 서향 직사광선에 노출되는 바람에 홈팀이 관례와 반대로 3루에 앉는 진풍경까지 생겼다. '방위를 잘못 잡으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의 교과서 같은 사례다.여름 직관 팁으로 정리하면라이온즈파크·챔피언스필드: 오후로 갈수록 내야 그늘이 넓어지는 구조. 챔피언스필드는 3루 쪽이 해를 덜 받는다.사직·수원: 남향이라 낮경기 때 내야 관중석도 해를 정면으로 받는다. 모자·선크림 필수.문학·창원·대전 등 남동향 구장: 남향보다는 덜하지만 오후 해가 관중 쪽으로 들어오는 계열이다.밤경기가 기본이 된 시대라 체감 차이는 낮경기·주말 이른 경기에서 가장 크다.구장이 바라보는 방향 하나에 100년 치 규칙 변천사, 각국의 건축 문화, 그리고 '그늘을 누구에게 줄 것인가'라는 철학이 담겨 있다. 다음에 낮경기 표를 끊을 때, 그 구장의 나침반을 한 번 떠올려 보시길.